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빙그레 이글스 (문단 편집) === 1990년 === 1990년 신인지명회의에서 1차지명으로 지명할 수 있는 선수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든 가운데 빙그레는 북일고 투수 김성한과 동국대 내야수 [[지화동]]을 지명했다. 2차지명에서 드래프트 풀이 굉장히 나빴던 가운데 1라운드에서 [[진상봉]]만 들어오게 되었다. 손문곤과 조용호는 신생팀인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로 떠났다. 전년도 유일한 6할 승률을 기록한 페넌트레이스 우승팀답게 이 해 페넌트레이스도 상당기간 선두를 지켰다. 한국시리즈 4연속 우승팀 해태가 이전보다 다소 부진한 출발을 보냈고 줄곧 5할 승률 근처에 머물러있던 반면 빙그레는 개막 4연승으로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갔다. 6월초 꼴찌까지 내려갔던 [[LG 트윈스]]가 1달 간 파죽지세의 상승세로 빙그레로부터 선두자리까지 빼앗고 빙그레는 삼성에도 2위 자리를 내주며 3위가 되었으나 7월 20~22일 더블헤더 포함 대전구장에서의 LG와의 4연전에서 모두 싹쓸이하며 LG에게 대전구장 19연패[*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특정팀 상대 한 구장 최다연승/연패 기록이다.]라는 악몽을 안기고 선두를 탈환했다. 8월에는 삼성에게 잠시 선두자리를 빼앗기기도 했으나 삼성이 LG, 해태와의 경기에서 주춤하면서 선두를 탈환했다. 잔여경기가 불과 18경기만 남은 1990년 9월 6일 시점에서 빙그레는 14경기만 남은 2위 LG에 4경기차, 15경기 남은 3위 삼성에 5.5경기차, 20경기 남은 해태에 7.5경기차로 빙그레의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은 대부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난데없이 언론을 통해 김영덕 종신감독 계약설이 불거지면서 팀 분위기가 급격하게 어수선해졌다. 종신계약설로 인해 김영덕 감독과 강병철 수석코치와 사이가 벌어져 시즌 종료 후 강병철은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떠나게 되었다.[* 원래 강병철 감독은 김영덕 감독과 나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1987년 10월 입단 당시 '차기 감독'을 약속하고 강병철 감독을 데려온 김영덕 감독으로서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감독을 계속할 경우 강코치와의 의리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하필 재계약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자 구단 간부는 김영덕, 강병철과 함께 회장실을 찾았다. 5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승연 회장은 “감독 더 하시오”라고 했다. 이 말이 종신감독으로 둔갑했다.] 9월 7~9일 LG에게 1승2패를 기록하며 3경기차로 좁혀졌고, 삼성에게도 1승2패를 기록한 사이 LG가 태평양에 스윕하며 12경기 남은 9월 13일 시점에서 빙그레는 LG에 1경기차까지 좁혀지게 되었다. 9월 14~17일 LG가 휴식일을 가진 사이 해태와의 홈 4연전이 페넌트레이스 우승의 최대 분수령이었는데 여기서 4경기를 모두 패하게 되며 LG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도리어 3위 해태에도 1경기차로 쫓기는 2위로 추락했다.[* 이때 1위 LG에서 4위 삼성까지의 승차는 불과 2.5경기였다.] 9월 18~20일 태평양과의 4연전에서 첫날 더블헤더 2연승에도 불구하고 2연패해 2승2패에 그치며 삼성에 1승2패를 기록한 LG를 넘어 선두를 탈환하는데 실패했고 9월 21일 삼성전에서는 3:5로 패하며 삼성에게 순위를 뒤집혀 4위까지 추락하기에 이른다. 9월 22일 삼성전에서 4:2로 이겨 3위를 탈환하고 선두 해태를 반 경기차로 추격했지만 해태가 6경기 남은 가운데 빙그레는 잔여 2경기만 남아 페넌트레이스 우승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9월 23일에도 삼성을 8:1로 이겼지만 1경기 남은 가운데 선두를 탈환한 LG에 반경기차로 뒤쳐졌다. 결국 9월 28일 최종전인 태평양전에서 0:4로 패했고 결국 페넌트레이스를 68승 2무 50패 승률 .575로 3위로 마감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치른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1차전 홈에서 [[이만수]]에게 7회 결승홈런을 허용하며 2:0으로 패배, 대구에서 열린 2차전은 한용덕을 이어 마무리로 나온 [[한희민]]이 9회말 김용철에게 동점홈런, 이만수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4:5 패배 허무하게 2전 전패로 포스트시즌에서 광탈하고 말았다. [* 이때 주전 유격수 [[장종훈]]의 부상으로 [[황대연]]이 아닌 북일고 이종호가 출장했다.] 지난해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장종훈]]은 더 성장하며 28홈런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유격수 홈런왕'''에 올랐고, '''91타점'''으로 '''단일 시즌 최다 타점''' 기록을 세우며 타점왕에 올랐다. 그리고 .545의 장타율로 '''장타율 1위'''를 기록하며 '''타격 3관왕(홈런, 타점, 장타율)'''이 되었다.[* 득점과 사사구에서도 2위였다.] '''2년 연속 유격수 골든글러브'''는 당연지사. 2년 연속 외야수 골든글러브의 주인공이던 [[이강돈]]은 146안타와 81득점으로 안타 1위(2년 연속), 득점 1위가 되었고, [[한대화]], [[노찬엽]]과 마지막까지 타격왕 경쟁을 했으나 해태의 최종전에서 5타수 4안타를 기록한 한대화에게 0.00007의 차이로 타격왕을 내줬다. 그래도 '''3년 연속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지난해 부상으로 부진했던 이정훈은 117안타와 22도루로 살아나며 2년 만에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지난해까지 [[김성갑]]의 백업이었던 [[강석천]]은 데뷔 첫 100안타와 함께 태평양전에서 팀의 2호 [[사이클링 히트]]를 쳤고 16개의 도루와 24개의 2루타(리그 전체 2위)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주전 포수가 [[유승안]]에서 [[김상국]]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는데 포수와 지명타자를 오간 유승안은 14홈런으로 마지막 불꽃을 장식했고, 주전포수 자리를 차지한 [[김상국]]은 커리어 최고였던 .287의 타율과 함께 10개의 홈런, 8할대의 OPS로 타격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타격왕 [[고원부]]는 .253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창단 이후 굳건한 에이스로 활약했던 [[이상군]]은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혹사당한 여파로 이해 6승에 그치며 부진했다.[* 방어율은 3,13으로 준수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86.1이닝밖에 먹지 못했다.] 그와 원투펀치 파트너였던 [[한희민]]이 방어율이 4점대로 상승했지만 12승과 157이닝으로 여전히 선발의 한 축을 맡아주고 있는 가운데 배팅볼 투수에서 정식 선수 전환 이후 2년간 2승-2승을 기록했던 [[한용덕]]이 팀내 최다승인 13승, 최다이닝인 171이닝을 소화하며 에이스로 성장했다. 개인 첫 100탈삼진도 달성하며 전성기의 신호탄이 되었다. 입단 2년차인 [[송진우(야구)|송진우]]는 마무리 투수 역할에 주력하며 방어율 1.82(2위)에 11승 7패 27세이브를 기록, 구원(구원승+세이브 수 기준)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김대중]] 대통령(당시 총재)과 한자까지 이름이 똑같았던 동명이인인 [[김대중(야구선수)|김대중]][* 이로 인해 광주 [[무등 야구장]]에 가면 원정팀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해태 홈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은 커리어 유일한 10승을 기록하며 마운드의 한 축을 맡아줬다. 이해 선발진은 한용덕, 한희민, 김대중, 이상군으로 주로 꾸려지고 그 뒤에는 선발진인 김홍명과 김락기 등이 뒤를 이었고, 계투진은 [[이동석]]-[[장정순]]으로 나름 입지를 다졌다. 한편 대어급 신인으로 각광을 받은바 있던 [[이효봉]]은 부상으로 인해 7경기 출장에 4점대 방어율에 그치며 입단 1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